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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문식

 

 

내가 교회에 첫 발을 디디게 된 이유는 순전히 여자 때문이다.


친구 아버지의 초상으로 밤새 문상 중이었던 나는 당시 친구 여동생의 피아노 선생이었던 한 여자에게 운명적인 ‘필(Feel)'이 꽂힌 것이다. 염불에는 뜻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더니, 상가 집 문상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온통 그녀에게만 시신경 전체가 쏠리고 있던 나는 점차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위한 전략을 짜느라고 골몰하게 되었고, 그 기초자료(Data)를 모으기에 바쁜 삼일을 보냈다. 아버지를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겨 정신이 없는 내 친구에게도 그 경황없음을 틈타 그녀에 대한 온갖 정보를 슬슬 캐내기 시작했고, 친구 여동생에게도 눈치 못 채게 이것저것 쓸데없는34_71_4234 것을 묻다가 그녀에 대한 질문을 슬그머니 끼어 넣곤 했다. 참으로 망자와 그 유족에 대하여 심히 염치없는 짓이었으나, 어찌하랴 이 모든 것이 청춘의 특권인 것을….

어쨌든 이런 조심스런 탐문 끝에 몇 가지 결정적인 접근 경로를 확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가 그리스도인이며, 교회 성가대의 반주자이기 때문에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 밤이면 꼭 ○○교회에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기독교에 조금만 관심을 보이면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며, 더 나아가 아주 적극적으로 상대방을 꼬셔서 예수쟁이로 만들려는 아주 고질적인 습관이 있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는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게임은 끝난 것이다!

나는 그 다음부터 그녀에게 아주 자연스런 접근을 시도했으며 슬슬 그녀의 교회에 나가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이 기독교에 진진한 종교적 관심을 갖고 있음을 언뜻 언뜻 엿보이기 시작했고, 가끔 성경을 읽는 척 하였다.

 

 

 

걷잡을 수 없는 도파민의 은혜


나는 고1때에 이미 당시 휘문출판사에서 나온 5권짜리의 「니이체 전집」을 완독함으로써 반기독자 - 「안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철학적 논리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그 후에는 서구 실존주의 계열의 작품에 깊이 심취되어 있어서 「까뮈」나 「사르트르」,「하이데거」등의 무신론적인 실존주의 계열의 사상가들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다. 다만 실존주의 사상가 등의 스펙트럼을 조금 더 넓히려는 차원에서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분류되는 「도스또예프스키」나「키에르케고르」의 작품 등을 나름대로 흥미롭게 읽고 있을 때였다. 말하자면 당시의 나의 내면세계는 철저하게 「무신론자」로서의 좌뇌 구조를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던 터였다.

돌이켜 보건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완악한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논리적인 좌뇌보다 감성적인 우뇌로 우회하여 공략하시기로 작정하셨던 모양이다. 나는 결국 하나님의 이 기발한 우회 전략에 꼼짝없이 걸려들어 하나님 나라의 미인계와 뇌 내 호르몬 ‘도파민’의 분출 작용에 의해 제 발로 그토록 멀리하던 교회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75년 초봄, 하나님의 걷잡을 수 없는 도파민의 은혜가 나에게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말하건대, 남녀가 서로 눈이 맞고 맘이 맞는 ‘필(Feel)'-소위, 큐피드의 화살이 꽂히기 시작하면, 갑자기 인간의 뇌에서 ‘도파민’의 분비가 왕성하게 되며, 약 1년 간 계속 분출되는 이 호르몬의 작용으로 남녀는 서로 눈빛만 보아도심장이 떨리고 황홀해지며 걷잡을 수 없이 서로 끌리게 되는 이른바 ‘남녀상열지사’가 시작된다는 최근의 의학적 보고가 있다.」

 

 

성령과 무의식


그녀와의 운명적인 만남과 정기적인 교회출석이 이루어진지 2년쯤 지났을 때, 나는 드디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소위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어느 초여름 수요일 저녁,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사건에 대한 ○○목사님의 열정적인 설교를 듣고 난 후, 나는 전에 없는 내적 회의와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갈등」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나는 그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주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아니! 예수가 부활했다니…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 이 집단이 완전히 종교 편집증에 사로잡힌 광신자 집단이구만… 내가 사랑하는 이 여자가 이런 집단의 일원이라니…”라는 충격과 함께, 일면으로는

“정말 예수가 부활한 것일까? 그리스 철학을 공부한 사울이라는 청년이 부활한 예수를 길에서 만났다는 이 사건이 혹시 진실이 아닌가? 그럼 내가 생각하던 예수 - 유대랍비요, 젊은 도덕선생인 예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거! 내가 비정상적인 예수쟁이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보니 나도 어느덧 조금씩 감염되었나 보구나! 이런 쓸데없는 갈등이 내 안에 생기다니…” 등등의 생각이 동시에 스쳐갔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이 「무의식의 갈등」 이 너무 강력하게 나를 짓눌러서, 스스로 ‘생애 최초의 기도’를 예수께 중얼거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교회 2층 한 구석에서 이렇게 속으로 외쳤다.
“예수여 ! 당신이 정말 부활한 神이라면, 정말 神의 아들이라면, 나에게도 한 번 나타나시구려!”라고…

그런데, 이 생애 최초의 진지한 기도는 그때에도 응답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무려 30년 동안이나 아무 응답이 없다. 내가 다메섹에 가지 않았기 때문일까? 서울 한복판의 대로에서는 안 나타나는 예수인가? 어쨌든 예수는 서울대로에서 내게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다음주 수요일 저녁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오른쪽 와이셔츠 주머니에는 「담배」를 꽂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예배 시작 10분후에 교회 2층 한 구석에 슬그머니 들어가 앉아있던 나에게 무의식 속에서부터 이상한 충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먼저 찬송가 가사가 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축축한 종교적 감성에 흠뻑 적셔지며 떠오르기 시작하였고, 그 동안 익숙해진 멜로디에 따라 그 찬송가를 따라 부르고 싶은 깊은 충동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기도 시간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푹 숙이고 내 생각이 따라가며, 「아멘」하려고 하는 이상한 종교적 증상이 불쑥 일어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내 시선이 강대상 아래편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반주자석에 꽂힌 것이 아니라, 방향을 돌려 가운데 있는 목사님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설교 시간이 끝날 때쯤에 나는 그 말씀에 깊이 감동이 되어 어느덧 머리를 숙이고 있는 어색한 종교 행위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 점점 성경이 깨달아지기 시작하였고,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번개처럼 내 뇌리에 박히며, 또 살아 있는 구절처럼 서로 연결되며 내게 「거룩한 논리」로 불붙듯이 다가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깊은 회개 - 참회와 애통의 마음이 동반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 내면의 숨겨진 자아의 한계와 갈등, 그리고 더욱 예민해진 양심의 자각과 고뇌를 깊이 쏟아내기 시작하는 걷잡을 수 없는 종교적 회심의 체험을 드디어 겪게 된 것이다. 드디어, 소위 「중생」- 거듭남의 역사가 내게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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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회심


존 스토트 목사는 성경적 회심을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첫 번째가 인격적 회심 (Personal conversion)의 과정이고, 두 번째가 문화적 회심(Cultural conversion)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인격적 회심’의 과정에서는 무의식 영역에서 일어나는 중생(regeneration)의 역사와 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회개(repent)의 역사가 동시에 수반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 예수를 믿고 회개하는 것’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는 것’은 언어적 순서일 뿐, 사실은 성령의 동시적 사역이라는 것이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먼저 거듭나야, 그 결과로 영혼이 죄와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회개하는 것’이지만, 이 ‘중생’과 ‘회개’는 무의식과 의식의 부분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체로 이 ‘인격적 회심(Personal conversion)’은 오랜 시간동안 성령의 은혜의 축적 과정을 통하여 다가오기도 하고, 또 갑자기 단번에 다가오기도 하지만, 대체로 어느 한 순간 - ‘영원한 단 번의 사건(eternal once event)’으로 일어나는 것이다(요3:8) ‘거듭남’은 결정적인 구속의 인을 치는 사건으로 단번에 영원한 효력을 갖는 구속 사건인 것이다.

반면에 ‘문화적 회심(Cultural conversion)’은 중생 이후 오랜 시간을 거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성화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회심자는 심리적․사회적․세계관적인 가치 체계의 변화를 점진적으로 겪게 되며 이른바 ‘삶의 양식(Life style)'의 변화를 수반하게 된다.

신앙 고백에 있어서도 ‘인격적 회심’이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Saviorship)'을 인정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문화적 회심‘은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Lordship)'에 그 강조점을 둔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되심만 강조되고, ‘주’되심이 간과되면 소위 ‘값싼 은혜’의 함정에 빠지게 되며, 반면 ‘주되심(Lordship)’만 강조된다면 잘못하면 ‘윤리주의’ 혹은 ‘공로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진정한 성경적 회심이란 예수를 ‘그리스도요, 주’로 동시에 고백하는 것이다(행2:36). ‘귀신들도 예수의 신성을 믿고 떨지만, ‘주(Lord)'로 고백하지는 못한다(약2:19)’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으로만 예수를 주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고전12:2)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Lord)와 그리스도(Savior)가 되게 하셨느니라”는 초대교회의 사도 베드로의 첫 전도 설교의 이 두 강조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진정한 성경적 회심은 이 고백의 두 초점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온전한 회심은 항상 인격적인 회심과 문화적 회심이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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